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예루살렘 왕국 (문단 편집) ==== [[전성기]] ==== *''' 멜리장드 & 풀크 ''' [[1131년]] 보두앵 2세가 사망한 후 예루살렘 왕국의 4대 국왕으로 즉위한 사람은 특이하게도 3명이었다. 여왕 멜리장드와 왕 풀크,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차기 국왕인 [[보두앵 3세]]였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멜리장드]]와 [[풀크]]가 공동으로 왕좌에 앉았다. 보두앵 2세의 여러가지 노력으로 승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해 [[9월 14일]] [[성묘교회]]에서 즉위식이 거행되었고 멜리장드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왕립 대의회 오트 쿠르(Haute Cour)에 의해 어려움없이 통치자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풀크는 공동왕에 오르자 마자 유럽의 보수적인 [[관습법]]을 들먹이며 왕권을 독차지하려고 했다.[* 당시 유럽 귀족들에게 '이교도에게 포위되어 있는 데다가 전쟁이 한참인데 여자가 왕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냐?' 정도로 치부됐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온 앙주 출신 가신들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여 다른 유럽의 기사들의 지원을 받아 공개적으로 멜리장드에 대한 권위와 능력에 이의를 제기했다. 왕이 지속적으로 여왕의 왕관에 의문을 상기시키면서 그녀를 하나 둘 권력에서 배제시키며 예루살렘에 대한 통치권을 점차 잠식해 나가자 유럽에서 넘어온 귀족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는 다른 [[십자군 국가]]들을 예루살렘 왕국에 종속시키려 노력했다. 이를테면 고향이었던 프랑스 왕국처럼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화를 시도했던 셈인데, 이로 인해 본래 이곳에 정착했던 토종 우트르메르인 오트 쿠르의 구성원들은 자신의 권력과 지위가 바람 앞에 촛불처럼 느껴지게 됐다. 풀크는 왕위에 오른 지 1여 년 만에 자신의 수완을 마음껏 발휘하며 예루살렘의 중심부를 쥐락펴락하는 수준이 된 것이다. 보두앵 2세의 능력 위주의 사위 간택이 도덕적 지배하의 예루살렘이 그를 상대하기 버거운 것은 기정 사실화였다. 겉보기에는 일개 프랑스의 영주인 듯한 풀크가 그렇게 수완 좋은 강력한 군주였던 이유가 있었다. 사실 그는 유럽 왕실 및 영주들의 복잡한 혼인관계와 대립의 정점에 있었다.[* 간단히 말자면 결혼을 통한 확장을 한 것이다] 풀크 5세의 정확한 탄생 년도가 기록으로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아마도 1089년에서 1092년 사이 앙주 백작 풀크 4세(Fulk IV d'Anjou)와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Bertrade de Montfort)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추정 가능하다. 풀크(당시는 앙주의 풀크 5세)가 20세 가 채 안된 시점인 1109년 아버지인 풀크 4세의 사망으로 앙주 백작의 지위를 계승했고, 이후 풀크 5세는 에멩가르드 드 멘(Ermengarde de Maine)과 결혼하여 그녀의 영지까지 자신의 통제아래 두었다. 결혼을 통해 전쟁 없이 영토를 합병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투자가 어디있었겠냐만은,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결혼을 제테크로 삼던 풀크 5세와 그에게 제테크 교육을 받았던 유럽에 남아있던 후손들이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땅을 전쟁없이 쓸어 담자 결국에 10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될 정도로 나비효과 마냥 번져서 이후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대립조차 풀크의 영토 확장에 한몫을 하게 된다. 어쨌든 먼 훗날의 이야기고, 당시 풀크 5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를 도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와 맞서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의외의 꿀 혼맥이 그의 가시권에 들어왔고 그 옵션은 그를 막강한 대귀족의 반열로 인도했다. 즉 풀크 5세의 장남인 조프루아 5세(Geoffrey V de Anjou)와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Matilda de Normandy)[41]를 1127년 혼인시킨 것이다. 사실 헨리 1세에게는 어린 아들도 있었지만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기에 마틸다가 부계로 따졌을 때 정복왕 윌리엄의 마지막 혈통인 셈이다. 조프루아는 당시 유럽에서 소문난 미남자에 검술 능력도 뛰어나 유럽 기사의 표지 모델이었고 전투에 나갈 때마다 금작화 가지를 투구에 꽂은 것 때문에 플랜태저넷(Plantagenet)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곧 그의 가문명이 된다. 이 결혼은 결국 앙주 가문이 프랑스 국왕에게 위협이 될 정도의 큰 이익이 되었다. 헨리 1세의 사후 마틸다가 왕관을 차지하려 하자 모계의 스테판 블루아가 대립하여 긴 내전이 발생하지만 여차여차하여 풀크의 손자이자 조프루아와 그녀의 아들 헨리 2세(Henry II of Plantagenet)가 영국 왕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헨리 2세 역시 조부와 부친의 결혼 제테크를 가훈으로 삼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여자였던 엘레노오르 드 아키텐 (Eleanor de Aquitaine)과 결혼하여 프랑스 남서부 전역을 예물로 가져오는 파문을 일으킨다. 잉글랜드 전역과 아일랜드, 그리고 프랑스의 반 토막을 그의 손자인 헨리 2세가 차지하게 된 것을 현대에 앙제빈 제국(Angevin Empire)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결혼란기의 선봉에는 풀크가 있었고 그가 행했던 여러 가지의 권모술수는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유럽에서는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다. 풀크가 결혼 제테크를 선호하고 그 폐해를 뼈저리게 잘 알던 루이 6세는 때마침 예루살렘 왕국 사절단이 사윗감 찾으러 도착하자 그 혼맥을 미끼로 소개시켜 줌으로써 프랑스의 재앙이었던 그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버리려 했고 그로 인해 풀크 5세가 레반트 지역으로 왔던 것이다. 풀크가 예루살렘 왕국을 종속국들을 포함하여 단독 통치하려고 나서며 자신들의 자치권을 축소시키자 [[십자군 국가]]인 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트리폴리 백국은 이방인 왕을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나섰다. 사실 십자군 2세대들 시각에서 보면 이건 완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밖으로 밀어내는 상황이었다. 본래 자신들의 부모 세대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것을 물려받아 지켜온 그들로서는 십자군 원정에 별 기여도 하지 않은 이방인이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 당연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1134년]]에는 결국 우려했던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 반란의 핵심 인물인 십자군 2세대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앞서 언급했던 야파 백작 위그 2세였다. 그는 선왕의 딸이자 6촌 관계인 멜리장드 여왕에 대해서는 충성을 바쳤지만 풀크에 대해서는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 풀크 국왕 반대파들이 백작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반발이 생각 외로 심하자 풀크는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한다. 반란이 터지자 멜리장드가 야파의 위그 2세 드 퓌제(Hugh II de Le Puiset)와 바람을 피운다는 괴 소문이 왕국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도를 넘어선 루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뻔했기에 결국 남편과 아내가 서로 소원해졌다. 왕가의 즉결적인 대화가 이루어 지지 않자 아랫 사람들이 스스로 일을 키우는 판이 펼쳐진 것이다. 야파의 위그 2세는 당시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였으며, 5촌 당숙인 보두앵 2세에게 헌신적으로 충성했었다. 이 충성도는 대를 이어 이제 멜리장드까지 이르렀다. 여왕의 6촌이자 어린 시절 친구가 불륜을 들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돌자 반란군에 적대적인 야파 백작의 사위인 가이사르 드 그레니어(Guautier de Grenier)는 반역죄로 그를 비난하며 그에 결투를 신청한다. 위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만, 사법 결투를 위해 약속된 날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유죄 판결을 받았다. 아무튼 이는 진위 여부와는 관계없이 자신을 제거할 목적이라는 사실을 안 위그 백작은 야파에서 인근의 아스칼론의 무슬림 군대와 동맹을 맺기에 이른다. 이집트인들의 영토였던 아스칼론으로 갔지만 그의 신하들은 이집트 동맹을 거부하고 그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여기서 아마도 멜리장드의 부탁을 받은 주교의 중재로 간신히 군사적 충돌은 모면할 수 있었다. 결국 중재안이 마련되었는데, 위그는 대의회에 출석하고 3년 동안 추방 선고를 받게 된다. 위그 백작에게 3년간 추방령을 내리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3년 있다가 돌아오는 정도면 목숨을 걸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더 안전해 보였기 때문인지 위그 백작은 여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결국 위그 백작이 안심하고 배에 올라타다가 브르타뉴 기사에게 공격받아 중상을 입었다. 누구의 사주인지는 왕국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현장에서는 살아남았지만 시칠리아에 도착하자 곧 사망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인내하고 있던 멜리장드의 진노는 풀크와 그의 유럽 출신 기사들에게 오랫동안 머무르게 된다. 예루살렘 왕국은 개국 취지가 취지인 만큼 표면적으로는 엄격한 도덕적 왕국으로 신실한 기독교적 덕치가 중요했다. 그런 왕국이기 때문에 풀크의 노회한 계략이 발각되기 전까지는 그에게 광폭 행보를 가능하게 했지만 [[십계명]]을 하나 같이 어겨버린 듯한 추악한 사건의 명백한 주동자로 의심받자 풀크는 급속하게 왕국 내에서 정치 영향력을 상실하고 [[1136년]] 이후로는 멜리장드를 따르는 분파가 권력을 잡았다. 이후 내부적으로 고립된 풀크는 시선을 외부로 돌려 왕국 변경의 방위에 힘썼다. [[1137년]] 모술의 아타베그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점차 세력을 키워 군세가 최 전성기에 차 올라 확장을 거듭하다 결국 십자군의 우호적인 다마스쿠스마저 위협했는데 [[1140년]] 이후부터 풀크는 다마스쿠스를 도와 장기의 군대에 맞섰다. 장기의 지하드 선포와 수차례의 대규모 진군이 있었으나 풀크는 살라흐 앗 딘 이전의 이슬람의 구심점인 장기와 호각지세를 이루며 오히려 장기를 한수 접게 만드는 전황을 이끌어 냈었다. 또한 예루살렘 남쪽 국경 주변 고지에 케락(Kerak) 성채를 구축했고, 파티마 왕조의 아스칼론과 접해 있는 [[헤브론]]의 방비와 더불어 이집트 공격에 대한 왕국의 교두보 역할을 할 성채가 없었기 때문에 일련의 요새화로 작은 마을을 둘러 쌀 것으로 대의회에서 의결할 것을 주문했다. 이 국경 도시를 점진적으로 둥글게 둘러싼 계획에는 이벨린(Ibelin), 동로마 시대 폐허가 된 성벽과 탑의 일부를 재사용하여 재구축한 요새 베스기벨린(Bethgibelin), 갓(Gath) 지역의 블랑쉬 가르드(Blanche Garde) 등이 포함되었고 십자군 요새가 건설되어 왕국의 방위를 튼튼하게 했다. 막장이었던 파티마 왕조는 감히 침범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장기 역시 풀크의 능력에 주춤거리는 상황이 되자 내부적으로 왕국은 문화가 융성해지고[* 이 시절에 만들어진 십자군 시대의 각종 보물과 성채가 아직까지 현존하는 것이 많다.] 유럽에서 순례자가 모여들며 상업이 발달하는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1143년]] 풀크는 아내 멜리장드와 함께 [[아크레]]에서 사냥을 하던 중 낙마 사고를 당했는데 사흘을 의식없이 보내다가 결국 [[11월 3일]] 아크레에서 죽었다. [[기욤 드 티레]]의 기록에 의하면 너무 심한 뇌진탕으로 코에서 뇌수가 흘러나왔다고 하며, 비록 멜리장드는 풀크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전통대로 풀크는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의 역대 국왕들의 묘역에 4번째로 안치되었다. 결국 그의 사후 예루살렘 왕국은 무슬림에 대항하는 노련한 군사 지휘관을 잃어버렸기에 장기는 십자군 국가에 대한 진군을 계속하여 [[1144년]] [[에데사 백국]]이 무너졌고 이는 제2차 십자군의 발흥의 계기가 되었다. [[기욤 드 티레]]는 풀크가 멜리장드에게 루머를 덮어씌우는 일에만 할애하며 왕국의 원주민에 대한 불신으로 앙주 출신의 새로 도착한 프랑크인들을 과도하게 선호한다고 지적했다. 멜리장드가 정말로 죄를 지었다면, 교회와 귀족들이 그녀를 옹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기욤이 멜리장드의 아들 보두앵 3세의 동창생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하는 기록이지만 남은 기록이 많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